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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르테논 신전 - 고대
예술은 인류와 함께 웃고, 울고 발전해 왔다. 사람들 각각은 인식하지 못하지만 예술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그리스의 의사 히포크라테스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은 남겼다. 여기서 예술은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예술이 아니라 기예, 구체적으로는 의술을 말한다. 고대 세계에서는 미술은 다른 기술과 구분되지 않았고, 시인과 미술가를 포괄하여 지칭하는 예술가 개념은 없었다. 고대 예술의 특징은 예술생산자와 예술수요자의 지위격차이다. 예술가는 노동계급으로 사회적 지위가 낮지만 예술수요자는 유한계급으로 지위가 높다. 또한 예술생산자와 예술작품이 분리되어 생각됐다. 고대 사회에서는 예술작품은 존중받았지만 그것을 제작한 예술가는 천대 받았다. 또한 머리를 사용하는 시인은 존중 받았지만 손발을 쓰는 미술가와 배우는 천시되었다.
고대의 예술수요자는 시민 공동체였다. 이에 예술도 공동체적 성격을 지닌 장르가 발달했다. 미술 분야에서는 신전, 야외극장, 경기장 같은 공공 건축이 발전했고, 연극은 시민 공동체의 종교 축제로 발전했다.
◁ 생드니 수도원 - 중세시대 고딕양식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5세기부터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략 14-15세기를 중세라 한다. 1,000년 무렵 유럽은 정치.문화적으로 교회가 지배하는 기독교 사회였다. 경제적으로는 봉건제 사회인 중세의 모습을 갖추었다.
봉건귀족과 교회는 경제적 이익을 두고 힘을 겨뤘는데 대부분 교회가 우위를 차지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가 한겨울 눈밭에 엎드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파문을 철회해 달라고 빌었던 ‘카노사의 굴욕’은 세속 봉건권력이 교회 권력에게 굴복한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사건이다.
중세 후기인 1,000년~1,500년 사이에 유럽에서는 로마네스크와 고딕, 두 예술양식이 발전했다. 로마네스크는 남부 유럽에서 융성했고 고딕 예술은 12-16세기에 프랑스.영국을 중심으로 서북부 유럽에서 융성했다. 중세예술은 무엇보다도 신을 위한 예술 즉 종교예술이었다.
교회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로마식 건축법을 이용하여 성당을 지었고 그것은 로마네스크 양식이 되었다. 지금도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농촌 한 가운데 고즈녁히 서있는 로마네스트 양식의 교회를 볼 수 있다.
또한 도시 교회는 상인이 바치는 돈으로 부를 축척하여 성당을 건축했다. 생드니 수도원은 고딕 성당건축이 시작된 곳이며 이어 파리 노르트담 성당, 샤르트르 성당, 랭스 성당은 고딕 양식을 본받고 발전 시켰다.
◁ 보티첼리 <봄>- 르네상스
르네상스 예술은 15세기 이탈리아를 무대로 한다. 예술사에서 르네상스 시대만큼 다양성이 존재한 시기는 드물다. 로마 교황청의 종교 예술수요와 새로 등장한 이탈리아 도시귀족의 세속 예술수요가 경쟁하고 있었다, 부르고뉴 공국 같은 전통 봉건귀족도 아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르네상스 예술은 이런 다양한 갈래의 예술 수요를 반영하여 다양한 경향을 나타냈다.
르네상스는 어떠한 관점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모습이 달라진다. 네덜란드의 여사가 호이징하는 부르고뉴 공국을 무대로 <중세의 가을>이라는 저서를 썼으며, 보티첼리는 <봄>으로 르네상스의 분위기를 나타내었다.
15세기 초까지만 해도 미술가는 미천한 장인이었다. 말단 관리에 지나지 않던 미켈란젤로 아버지는 아들이 미술가가 되려고 하자 극구 반대한다. 지금과는 달리 미술가는 출신 성분이나 교육 수준이나 다른 길드에서 일하는 장인과 차이가 없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후원자로부터 보수를 제대로 못 받았다고 여러 차례 불평했을 정도이다.
하지만 도시귀족과 부유한 상인이 미술수요자로 등장하면서 미술가의 경제적 지위는 개선됐다. 15세기 말 로마 교황청이 피렌체의 세속 후원자들과 경쟁을 벌이면서 거장 미술가들의 보수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교황청이 제시한 높은 보수에 미술가는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향했으며 피렌체의 도시귀족은 이들을 붙잡기 위해 보수를 더 높였다. 미술가들은 일거리와 보다 나은 보수를 따라 옮겨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특정 후원자에게 고용되면 수입은 안정되지만 마음대로 여행할 자유와 다른 후원자의 주문을 받을 자유가 제한되었다.
미술가의 사회적 지위향상은 그들의 작품에 반영되어 있다. 화가들은 자신의 그림에 서명을 하고, 그림 속에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라파엘로는 바티칸 궁정의 <아테네 학당>에 자기 모습을 그려 넣었고,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예배당 벽화 <최후의 심판>에서 가죽 벗기는 형을 받고 죽은 성 바르톨로메오의 얼굴 가죽에 자화상을 그려 넣었다. 이는 미술가들이 스스로를 그림 속의 위대한 학자나 성인과 대등한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증거이다.
◁ 베르사유 궁전 - 바로크
바로크 시대에는 세속예술이 주를 이루었다. 특히 궁전 건축과 공연예술이 성행했다. 바로크 예술은 왕의 위엄을 과시하고 그 영광을 칭송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전근대 예술은 미적 목적 아니라 다른 목적에 바쳐진 도구에 불과했다. 절대 군주는 거대한 궁전에서 화려한 무대장치를 사용한 연극, 오페라, 발레 등을 공연하여 사람들의 기를 죽였다. 베르사유 궁전 같은 건축 사업을 벌이거나 값비싼 장치를 동원한 무대를 공연 마지막에 부숴 버렸다. 화려한 궁정생활을 통해 귀족들은 사치와 오락에 젖고 왕에게는 아부하는 집단으로 변모해갔다.
인류가 진화하면서 겪은 가장 큰 변화는 전근대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행이다.
유럽 사회가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정치와 경제뿐만 아니라 예술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전근대 예술과 뚜렷이 구별되는 새로운 근대예술이 탄생한 것이다. 전근대사회에서 예술가는 왕.귀족.성직자 등 후원자의 주문을 받아서 예술작품을 제작했다. 후원제도에서 예술가는 후원자는 경제적 지원을 해주는 대신, 그가 만든 예술작품을 모두 소유했다. 후원자는 예술작품의 내용과 현식을 구체적으로 지시하여 제작과정을 간섭하고 영향력을 행사했다. 궁정과 교회의 귀족계급인 예술수요자에 비해 예술가는 사회적 지위가 훨씬 낮았고, 예술가의 인격적 가치는 그가 만든 예술작품의 가치보다 낮게 평가되었다.
◁렘브란트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 근대
근대사회에서 예술생산의 기반은 시장제도로 변화했다. 예술가는 자신의 주관에 따라 작품을 미리 제작하고, 그것을 예술시장에서 판매했다. 근대 예술수요자는 특정 후원자가 아니라 불특정 다수로 구성된 시장 수요자이다. 또한 시장에서 팔리지 않는 예술작품은 더 이상 상품으로 가치가 없어지기 시작하면서 작품이 상업성을 지니기 시작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미술수요자는 특권계층이 아니라 일반 시민이었다. 중간계급 수요자는 막대한 돈을 미술에 낭비할 여력이 없었다. 이 시대에는 소유모의 회화가 미술의 중심이 되었다. 네덜란드에서 중간계급 구성원으로 미술수요자가 확대되면서 미술사에서 처음으로 근대 미술시장이 형성되었다. 몇몇 관찰자는 미술수요자가 도시 중간계급을 넘어서 전국민적으로 확대되었다고 기록했다.
이 시대 시민들은 그림을 미적 대상으로 여기기보다 벽을 가리는 가구처럼 생각했다. 네덜란드 미술수요자들은 집을 장식하기 위해서 그림을 사기도 했지만 투자 목적으로 사기도 했다. 그들은 미술작품을 다른 물건과 마찬가지로 시장에서 사고파는 비인격적 상품으로 간주했다. 가구, 보석, 그림은 토지, 주식과 마찬가지로 인기 있는 투자 대상이었다. 네덜란드에서는 많은 양의 그림이 거래되었다. 사람들은 그림을 샀다가 가격이 오르면 다시 팔았다. 역사상 처음으로 미술작품에 상업성, 투자대상이라는 성격이 부여된 것이다. 또한 직업 미술상이 처음 출현했다. 이들은 미술시장을 안정시켰으며, 기술의 전문화를 촉진했다.
미술가들은 스스로 자기 상품을 알려야 했다. 헤이그나 암스테르담 같은 대도시에서 일부 화가들은 개인적으로 전람회를 개최했고, 미술상도 부유한 고객을 겨냥해 호화로운 전람회를 개최했다.
현재 우리나라 미술품 경매 시장의 규모는 2,000억원 수준이라고 한다. 미술품 경매는 서울옥션, K옥션, 옥션별, D옥션 등을 통해 참여할 수 있다. 이곳 말고도 사람들이 문화에 대한 욕구가 늘어나고 예술품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각 지역에서는 문화를 상품으로 내놓고 있다. 또한 작가들의 작품을 편하게 보고 매매할 수 있는 아트마켓이 성행하고 있다.
- 심하연 취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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