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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헤럴드 |
경기헤럴드 고문 유중희
제 자서전에는 '내가 살아온 곳'이라는 제목으로 스물두 번의 이사를 기록한 글이 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현재 군포시 산본에 정착하기까지의 여정입니다. 그중 결혼하면서 마련한 집이 열 번째 이사였고, 자식들이 고등학교 시절까지 함께 보낸 보금자리는 여섯 곳이었습니다. 자식들이 대학과 군대 생활할 때는 제주도 발령으로 떨어져 살았고, 결혼 후에는 분가했기에 자식들과 함께 이사한 곳은 여섯 군데였습니다.
그중 아이들이 어려서 기억하지 못하는 세 곳을 제외하고, 안양시 석수에서의 2년, 성남시 중원구 은행동에서의 4년, 분당에서의 10년을 아이들도 기억합니다. 큰아들 기준으로 석수에서 유치원과 초등학교 2학년까지, 성남 중원구 은행동에서 초등학교 6학년 10월까지, 분당으로 이사해서 2~3개월 만에 졸업하고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이후 제주도 발령으로 대학 생활은 혼자 보냈고, 군대를 다녀온 후 결혼했습니다. 자식들이 부모와 함께 살면서 기억하는 곳은 세 군데였습니다.
50대 후반에 직장생활을 마치고 퇴직 후 약 10년간 실업자로 지내다가, 지인의 가게를 돕기 위해 출근했고 3년을 보낸 후 2024년 12월 말에 다시 퇴직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약 1년 정도 다닐 것으로 예상했지만, 3년을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아내가 근무지에 들렀다가 영흥도에서 회를 먹었는데, 지금까지 먹어본 회 중 가장 맛있다고 하여 퇴직 전에 자식들을 데리고 가족 모임을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일요일은 교통이 복잡하여 토요일에 일정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둘째 며느리는 근무일이고, 큰아들은 손주 셋을 돌봐야 한다는 이유로, 결국 자식 2명의 결혼 전의 네 명만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17년 만에 며느리와 손주들이 빠진 네 명의 만남이었습니다. 큰아들이 어릴 적 추억의 장소를 함께 둘러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영흥도에서 광어 1kg과 대방어 1kg을 주문하니 네 명이 먹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후 성남 중원구 은행동의 주공아파트로 향했습니다.
안양 만안구 석수동의 19평 한신빌라에서 살다가, 날림으로 지어진 건물에 실망하던 중 성남의 주공아파트 분양공고를 보고 신청했는데, 미달로 자동 당첨되어 이사하게 된 곳이 성남 중원구 은행동의 주공아파트였습니다. 아파트 규모는 26평이었습니다. 당시 제 근무지는 서초구 서초동이었고, 안양 석수동이나 성남 중원구 은행동은 거의 같은 거리였습니다.
32년 만에 다시 찾은 이곳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지만, 주변은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두 아들은 당시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노태우 정부 시절 여섯 개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청약 열풍이 불었고, 우리는 그중 가장 인기 지역인 분당의 아파트를 신청했습니다. 경쟁률 120:1을 뚫고 당첨된 곳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분당의 아파트가 올라가는 모습을 보러 외출하는 것이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렇게 이사한 곳이 분당이었고, 아파트 평수는 49평으로 이전에 살던 26평에 비해 훨씬 넓었습니다. 이곳에서 큰아들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다녔고, 가장 오래 산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큰아들이 군대에 가고 둘째 아들은 건국대학교 충주 캠퍼스로 떠났으며, 저는 실업자였던 시기에 부부 둘이 49평의 넓은 집에 사는 것이 사치라고 느껴져 집을 처분했습니다. 1억 원에 분양받아 10년 후 4억 원에 팔았는데, 그 후 집값이 매년 2억 원씩 상승하여 3~4년 후에는 12억 원에 거래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분당의 그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원래 살던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리고 방문을 허락받으면 준비한 선물과 자서전을 전달하려 했습니다. 첫 입주자로서 차 한 잔 얻어 마시고 올 계획이었지만, 아내와 두 아들이 요즘 문화에서는 실례가 될 수 있다고 극구 말려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준비한 선물은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안양 만안구 석수동을 들르려 했지만, 그곳은 저층 빌라에서 고층 아파트로 재개발되어 옛 모습은 사라졌고 날씨도 추워 생략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사실 석수동은 2년만 살았던 곳이고, 큰아들은 유치원 시절이라 거의 기억하지 못했으며, 둘째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집에 돌아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두 아들은 돌아가도 되었지만, 술 한 잔을 나누며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식사 후 두 아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며느리와 손주들 없이 우리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과 함께한 시간은 매우 흐뭇하고 즐거웠습니다. 두 아들에게는 멋진 추억의 여행이 되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