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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으로 이웃의 행복을 만들어 주는 작곡가 오해균


송용순 기자 / sys5594@hanmail.net입력 : 2018년 08월 18일
ⓒ 경기헤럴드

세상 사람들은 어느 장소에서든 자신만 빛나고 싶어한다. 꽃처럼 피어서 별처럼 빛나는 삶을 좌우명으로 곡을 쓰면서 노래로 희망을 주는 오해균 작곡가. 그는 노래를 부르며 시름을 잊는 것처럼 아름다운 가락으로 사회의 따뜻한 공간을 만들고 있다. 스스로 독학을 하여 많은 노래를 작곡하고 가수가 되고 싶은 지망생들에게 언제나 큰 언덕이 되고 있다.

열악한 교육환경을 극복하다.
미호천과 상당산성으로 유명한 충북 청주시가 그의 고향이다.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상이용사 부친슬하에서 언제나 반듯하고 곧게 성장했다. 6.25참전으로 몸이 불편한 부친은 자식들을 위해 원호청에서 알선한 직장에서도 모범이셨다. 퇴임후에는 마을을 위해 새마을지도자 등 자원봉사활동을 전개하며 자식들에게 실천으로 가르침을 보이셨다.
가정에서 무한한 사랑과 무언의 가르침으로 일관하신 부친은 8남매 누구에게도 야단을 치거나 지적하지 않으면서 “적선지가 필유여경”을 가훈으로 만들어 올바른 행동을 주문하셨다. 반면에 모친은 억척이셨다. 자식들의 훈육을 맡아 회초리는 기본이었지만 마음속으로 사랑하는 분이셨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공부보다는 동생돌보기와 밭에서 모친을 도와주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였다. 연달아 생기는 동생들을 돌보며 일손이 부족한 모친을 도와주는 효자아들로 동네에서 칭찬이 자자했다. 그 와중에서도 음악적 재능이 있었던 그는 오락부장을 도맡아 했고 한 번 들은 노래는 거의 기억할 정도로 예능이 뛰어났다. 시간이 되면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부르며 동생들에게 가르쳐 주는 등 음악가의 꿈을 갖게 되었다.
그의 집 근처에는 중학교가 없어 그는 청주시내로 하숙을 하게 되었다. 지인의 집에서 하숙을 한 그는 학교까지 걸어서 1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것도 분에 넘쳤는지 얼마 후 집안의 사정으로 하숙을 그만 두게 되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집에서 학교까지 2시간 걸리는 거리를 걸어서 등교하는 등 학습 분위기가 그러자 결과는 최악이었다. 허구한 날 지각생으로 낙인이 찍히고, 학교생활에 큰 관심을 갖지 못한 그는 친구와 함께 극장포스터를 붙이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와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그가 교통이 지금처럼 편리했더라면 그의 모친에게 미안한 마음을 덜 갖는다고 한다. 중학교시절 학교에 일찍 등교하려면 집에서 6시에 나와야 하기 때문에 모친은 새벽 4시에 기상하셔 도시락과 아침을 준비해 주셨다고 한다. 지금도 그때의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힘들게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등하교시간으로 인해 성적은 하위권에 머물게 되었다. 집안에서는 장남으로서 큰 기대를 걸고 있었지만 성적이 오르지 않고 미래가 불투명하여 서울로 전학을 시켰다. 서울에 있는 작은 집에서 그는 세상 보는 눈이 달라졌다. 다양한 문화와 수준은 그의 마음을 동요시켰다. 그는 공부보다 음악가가 되기 위해 브라스밴드에 가입을 했다. 그리고 심벌로 시작하여 드럼과 트럼펫을 익히며 작곡가로서의 소양을 키워나갔다.

작곡가로 등용하다.
학교에서 여러 행사에 공연을 하면서 친구들로부터 받은 갈채는 미래의 작곡가에게 흥분을 주기에 충분했다. 부친이 상의용사로 인해 고등학교까지는 모든 등록금과 수업료가 면제가 되어 큰 어려움 없이 학업을 할 수 있었지만 대학은 지원이 되지 않아 그는 음악대학의 진학을 포기하고 사업일선에 뛰어들었다.
그는 1년간 측량을 배워 경기도 도시계획측량단에 들어갔다. 그는 안양유원지와 곤지암등 여러곳에 측량사로 투입되어 사회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급여는 고향 부모님에게 전부 송금했고 장남으로서 동생들의 공부를 가르칠 수 있다는 뿌듯함에 피곤을 잊으면서 최선을 다 했다.
그는 급여조건이 조금 더 좋은 석락산업에 입사하여 세계은행차관사업 공사에 측량기사로 참여하게 되었다. 하루의 일이 일찍 끝나면 그는 작곡에 관한 서적을 읽으며 잠시 놓아 둔 꿈을 키워나갔다. 음악이론은 고등학교 밴드부에서 배운 것이 전부인 그는 독학으로 작곡을 시작하여 KBS 우리들의 새 노래 아마추어 작곡가 등용문에 응모를 하였다. 당선이 된 그는 본인 스스로 재능이 있다는 것을 확인, 작곡 공부에 게으르지 않았다.
어느 정도 공부에 흥미를 갖고 자신감을 갖고 있을 때 군대입영통지서를 받게 됐다. 그는 통지서를 들고 집안 걱정으로 인해 일이 잡히지 않았다. 동생들 학비와 집안 생계 등 많은 고민들이 그의 발목을 잡았지만 눈물을 머금고 입대를 해야 했다. 그는 군에서도 음악의 끈을 놓지 않았다. 군가현상공모에 응모하여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가작에 선정되었다.
전역을 한 그는 친구와 함께 사무기기를 판매하는 사업체를 냈다. 처음에는 사업이 기대이상으로 잘 운영되어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됐지만 컴퓨터의 저변확대로 그는 사업을 접어야 했다. 몇 년 후 그 친구와 함께 비디오프로덕션을 시작했다. 그는 별도로 비디오샵을 내어 안정적인 운영이 되도록 기획을 세워 많은 수입을 올렸다. 이것도 오래가지 않아 사양사업으로 인해 사업을 정리하고 지인의 추천으로 군포에 오게 되었다.
그는 지인과 함께 세광음반 회사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작곡에 들어갔다. 당시 위금자 가수에게 몽중애연과 평양아가씨 곡을 줘 처음으로 앨범을 제작했다. 반응이 좋아 무명 중의 무명인 그에게 가수들이 조금씩 몰리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찾아 온 가수들에게 곡을 주며 가수로서 활동의 무대를 확대해 주었고 그동안 100여 명에게 음반제작을 해주었다.
그의 활동이 넓어지자 그는 군포예총에 가입하여 감사를 맡아 처음으로 단체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나름대로 화합과 예총의 자리잡기에 최선을 다했고 모태신앙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군포시에 불교단체가 없다는 것을 안 그는 지인들과 함께 군포불교신도회를 구성했다. 그때 안양시 불교신도회장의 소개로 청계사 주지인 석지명 스님을 만나는 인연을 갖게 됐다. 그는 군포시 포교당을 만들고 싶다는 제안을 스님께 하니 석지명 스님은 흔쾌히 포교당 조성 후원금과 스님을 추천해 주셔 군포시 산본동에 처음으로 포교당을 개사했다. 나중에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여 그 포교당은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고 그는 군포시불교신도회와 인연을 놓게 되었다.

문화예술의 발전에 기여하다.
하지만 불교자체까지 멀리 하지는 않았다. 그는 지인의 추천으로 조계종 중앙신도회 교육포교위원으로 위촉되어 포교활동에 적극 동참했다. 특히 가릉빈가소리를 만들어 군부대위문공연, 군법당, 훈련소 등을 방문하여 찬불가 보급에 누구보다도 앞장섰다. 더욱이 열악한 군법당을 위해 여러 가수들과 함께 후원금을 마련하여 후원하는 등 포교위원으로서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는 바쁜 일정에도 금천문화원 이사로 위촉되어 박재홍 가요제를 만들었다. 전통가요 보급과 금천구의 정주의식을 고취시키고 싶었던 그는 가요제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다고 한다.
그는 금천문화원뿐만 아니라 군포문화원 이사로 위촉을 받아 제1회 군포주부가요제를 개최하는데 일조했고 실버청춘극장을 2회 실시하여 어르신 정신건강에도 기여하고 있다. 그리고 군포문화원에서 꿈의 학교를 진행, 초중고 학생 중 선발된 32명학생들에게 일주일에 두 번씩 문화탐방, 실용음악 강의를 실기해 지역의 인재육성프로그램이 잘 운영되도록 동참하고 있다. 또한 군포문화재단의 생활문화팀에서 운영하는 ‘생동감’ 프로그램 시민위원으로 위촉받아 사업이 극대화되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는 노래 곡만 잘 쓰는 것이 아니라 시도 수준급이다. 사실 그는 통일부 주최로 열린 전국 백일장에서 ‘백두에서 한라까지’란 시를 작성하여 통일부장관상을 수상할 정도로 뛰어났다. 그는 이것을 계기로 하여 ‘동화야 나랑 놀자 1·2집’을 출간했다. 동화야 나랑 놀자는 평소에 존경하는 정각사 스님께서 수탁으로 운영하는 군포시립요양원에서 어르신들에게 구연동화를 해 드린 적이 있었다. 구연동화 중 어르신들이 이야기에 취해 계신 것 같아 어르신을 위한 동화를 쓰게 되었는데 좋은 반응을 얻고 있으며 불교아동문학연간집에 집필과 본생경 개작동화집에 참여하고 있다.
그는 지금 소설을 집필중에 있다. 음악과 시에서 인정받은 그는 자신이 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의 등불이 되고 싶은 내용으로 집필중인데 곧 출간이 임박하고 있다.
그는 그의 부모님을 가장 존경한다고 한다. 무언으로 자식의 성장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고 자식을 믿어 주는 부친과 마음속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모친을 가장 존경하며 자신도 그의 자식들에게 부모들이 한 것처럼 하고 있다고 불효에 대한 송구함을 전하고 있다.
그는 청소년들에게 ‘밥상교육을 철저히 받으라’고 전해주고 있다. 가정교육이 무너지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질서가 되어 어디에서나 존경을 받을 수 없다며 예의를 갖춘 청소년이 되라고 일러준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동생과 부모님을 위해 일찍이 산업전선에 뛰어 들어 효자로 생활하면서 자신의 꿈을 이룬 오해균 작곡가. 그는 음악을 통해 사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했고 100여편의 앨범을 제작하여 가수지망생들에게 꿈과 희망도 주고 있다.
노래의 작곡뿐만 아니라 시와 동화까지 섭렵한 그는 남은 인생에도 작곡을 통해 이웃이 하나가 되도록 일조하고 싶다고 한다.

약력
충북 청주시출생
군포시불교신도회 회장 역임
가릉빈가소리 단장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회원
한국음반산업협회 회원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신도회 교육·포교위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문화예술단체
금천문화원 이사
군포문화원 이사
한국불교아동문학회 회원
현재 활동 중인 가수 100여명 음반제작 및 작곡
본생경 개작 1~7집 참여
동화집 ‘동화야 나랑 놀자 1 ,2집’ 출간
군종교구장 표창장
통일부장관상 수상 외 다수


송용순 기자 / sys5594@hanmail.net입력 : 2018년 08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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