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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황금 돼지


경기헤럴드 기자 / rch2927@korea.com입력 : 2020년 11월 17일
ⓒ 경기헤럴드
 

                                                                                       

논설위원 · 전 교장 김용대

‘따르릉“
졸업생이 떠나고 재학생은 학년 말 방학으로 교정이 적막하여 무언가 채워 넣고자 하던 2월 중순, 여성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울렸다. 앞뒤 자르고 자신의 정년 퇴임사를 써달라는, 무례하게도 요청이 아닌 강요의 전화였다.
1년 전에 하남시의 학교로 승진 발령을 받아 여교장과는 수차례 관리자 회의와 식사 모임으로 알고 지낼 뿐이었다. 교직을 마무리하는 퇴임사는 편지 쓰듯 아무렇게나 쓸 수 없기에 대뜸 승낙할 일은 아니어서 전화기를 놓았다. 그분의 음성이 귓가를 떠나지 않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30여 명의 관내 교장 중에서 새파란 나에게 의뢰하기까지는 많은 생각을 하였음이 아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그분의 신중한 부탁을 차마 저버릴 수 없기에 부담을 감수하며 전화기에 손을 얹었다.
여교장은 미혼녀로 혼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퇴임사를 쓰기 전 몇 가지 여쭈어보면서도 가족이나 독신 생활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행여 상처를 건드리거나 자존심을 상하게 할까 해서다. 평소 여교장은 자존심이 강하고 당당했으며 농담도 잘했다. 대학교에서 국문학을 전공하였으니 퇴임사쯤이야 단숨에 쓸 수 있으련만, 몸과 마음에 스며있는 하늬바람을 보이지 않기 위해 동향이라는 이유를 들어 나에게 스스럼없이 의뢰했음이 분명 했다.
여교장의 그동안 교직 관점에 초점을 두고, 끝 부근에 그분이 들려준 소소한 이야기를 썼다.
“싸늘한 바람이 낙엽을 휘몰아치는 지난 늦가을, 몹시 아파 결근하고 병원에 다녀와서 누워있었습니다. 늦은 시간에 예고도 없이 여선생님 두 분이 찾아왔었지요. 저는 평소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를 썼습니다. 그날이 저의 생일이었어요. 두 분 선생님이 어찌 알고 미역국을 끓여 왔다기에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원고를 한 자도 수정하지 않고 회상하듯 목매어 낭독하여서 강당에 가득한 참석자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 완고하게 보이던 여교장도 평범한 여성임을 드러낸 것이다. 나는 독신의 심정을 모른다. 다만 기쁜 일도 슬픈 일도 같이 나눌 사람이 없기에 문풍지가 혼자 우는 격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퇴임 일주일 후, 이번에는 노트북을 사야 한다며 동행을 청했다. 본인은 컴퓨터를 잘 모르기에 선택해달라는 것이었다. 전문점에 가면 알아서 해줄 것을 굳이 나에게 의뢰할 일은 아니기에 내키지 않은 체 지정한 장소에 들어서니 여교장이 환한 모습으로 맞이하며 가게를 누볐다. 직원 앞에서는 더욱 기가 살아 명랑한 모습이었다. 나이 든 분이 물건 하나 고르면서 이렇게 신나 하다니. 아예 가격이나 성능 따위는 관심 없는 듯하였다. 직원이 여러 종류에 대한 설명을 끝으로 두 가지를 추천했다. 내가 무심코 신상품을 만지작거리는데 낭랑한 음성이 들렸다.
“이것을 살게요.”
‘아, 그렇구나. 수많은 날, 혼자 물건을 사면서 얼마나 위축되었으면 이 정도일까.’
짠한 감정이 밀려와 훔쳐본 옆얼굴이 백합처럼 활짝 피어 있지 않은가. 차로 10분도 안 걸리는 시내의 학교였거늘, 6년이 넘는 교직 선배와 따뜻한 차 한 잔도 나누지 않은 나는 지지리도 건조한 인간이었다.
온 누리에 봄이 가득할 즈음, 이번에는 운동장 가 느티나무 아래를 보라며 여교장이 전화기를 들고 벤치에 앉아 손짓하는 것이었다. 영락없는 현대판 여성 길동이었다. 아니, 장난꾸러기 아이 같다 해야겠다. 앉기도 전에 다짜고짜 내 전화기를 받아들더니 조그마한 황금 돼지를 달아주었다. 부모 형제도 없고 오로지 조카 한 명이 멀리서 살고 있다는 밑도 끝도 없는 말을 흘리며. 그리고는 네팔의 절에서 두어 달 생활하다 왔는데 더 깊은 사찰로 간다며 바람처럼 일어섰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을 성싶은 깊은 말에 찌르르 전율이 흘렀다. 여교장은 얽맸던 굴레를 벗어났기에 꿈을 찾아 훨훨 날아다니는 듯했다. 어쩌면 허허롭던 지난날을 훌훌 털어내고 새 세상을 누비지나 않는지. 손을 흔들며 떠난 서편 하늘에 구름 한 조각이 흘러가고 있었다.
농촌에서 어떤 곡식은 다음 해에 심을 튼실한 씨앗을 고르기 위해 어레미 질을 하곤 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사람을 접한다. 그중에 어레미 질 한 곡식처럼 빠져나간 이도 있고 남아있는 이도 있다. 대부분이 빠져나가 잊혔으나, 남아있는 이는 소중하게 간직되지 않던가.

몇 해가 흐른 후, 가짜임을 알았다.
핸드폰에 달린 황금 돼지가.
사연이 서린 선물에는 진한 애정이 담겨있다. 나는 그 선물을 보석함에 넣어두고 진짜처럼 아낀다. 가짜라는 생각을 티끌만큼도 하지 않고 네팔을 떠나며 정성 다해 마련했음이 틀림없기에.
이 시각, 여교장은 어느 하늘 아래에서 자신을 다스리고 있을까?

김용대 : 1994년 한국수필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수필가협회 회원, 경기한국수필가협회장 역임, 수필집《나도 낙엽인 것을 》,《소리, 그 울림》,《그 시절 초등학교》,《우표 없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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